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리아 테레사(스페인) (문단 편집) === 결혼 생활 === [[1661년]] 왕세자 [[그랑 도팽 루이]]를 낳고 그 밖에 2남 3녀를 더 낳았으나, 왕세자를 제외한 나머지는 다 5살이 되기 전에 죽었다. 남편인 [[루이 14세]]는 [[몽테스팡 후작부인]]과 [[루이즈 드 라 발리에르]] 등 수많은 애첩들을 거느리며 마리 테레즈는 그저 후계자를 낳아준 왕비로서만 대했을 뿐 거의 애정을 드러내지 않아서 상처를 많이 받았다. 그리고 스페인 궁정의 풍습은 점잖고 엄숙한 편이었는데 프랑스 왕정은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분위기라 여기에 적응하기도 힘들어했다고. 그래도 루이 14세가 염치는 있었는지 왕비로서의 위엄은 살려주기 위해 마리 테레즈의 방을 자주 찾았고, 모든 정부들에게 왕비의 방에 가서 문안 인사를 드리도록 하기까지 했다. 그 외에 기본적인 부부 관계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서 사이가 그 이상 벌어지지는 않았다. 마리 테레즈의 시어머니이자 고모인 [[안 도트리슈]]도 그녀를 감싸주었다고 한다. [[스페인]] 태생이라 그런지 평생 [[스페인어]]밖에 할 줄 몰랐고, [[프랑스어]]를 배우지도 않았다고 한다.[* 당시 프랑스어는 프랑스어라고 불리지 않고 국제어라고 불렸다. 한 마디로 지금의 재벌 2세가 한국어만 사용하고 영어는 전혀 모르는 것과 같은 이치. 그래도 루이 14세가 스페인어를 잘했기 때문에 부부 간의 소통에 문제는 없었다. 루이의 어머니인 [[안 도트리슈]]가 스페인 공주로, [[펠리페 3세]]의 딸이자 펠리페 4세의 누나였고 마리아 테레사에게는 고모였다.] [[마리 앙투아네트|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안토니아]]가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라는 망언을 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사실 시고조할머니인 마리아 테레사가 한 말이라는 설이 있다. 그것도 실제로는 흔히 생각하는 의미가 아니라, 굶주린 백성들을 보고 안타까워서 "저 사람들에게 [[브리오슈]]라도 주면 되지 않을까?"라고 말한 것이 악의적으로 와전되었다고. 궁정에서는 귀족들에게 호구 잡힌 신세나 다름 없었다. 귀족들이 도박에서 왕비가 잃은 돈 덕분에 먹고 산다고 할만큼 이겨본 적이 전혀 없었다고. 그리고 왕의 바람기에 항상 슬퍼하기만 했고 애첩들에게 무시당해도 대꾸도 못 했다니 어찌 보면 당연. 결혼 후 23년간 줄곧 외로운 프랑스 궁정에서 평생을 보냈으나 죽을 때만큼은 [[루이 14세]]가 곁에서 임종을 지켰다. 그녀가 사망했을 때 루이 14세는 “그녀가 처음으로 나를 슬프게 하는구나(voilà le premier chagrin qu'elle me cause).”라고 말했지만, 역시나 그 슬픔을 초스피드로 잊어버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